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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나무들의 보은(제주, 생각하는 정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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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0
조회수
4901
내용
나무들의 보은
김 종 길

이게 웬일인가. 키는 난쟁이요 밑둥의 굵기는 손 큰 어른의 두 뼘이 부족할 분재나무에 큼직한 배가 달렸다. 두 개는 성한데 하나는 절반이 시커멓게 상했다. 나무는 입새도 없이 앙상한 육신을 들어내고 있다. 한겨울 엄동의 노천이니 배는 벌써 낙과가 되었어야 할 일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다면서 우리 일행은 제주도의 한 분재원에서 배나무를 둘러싸고 시린 손을 부비며 안내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3~5년 정기적으로 뿌리를 관리해 주어야만 이런 작품이 가능하다나.

나무라면 그냥 심어 놓고 물주면 크는 게 아니던가. 사실 나는 제대로 커가는 나무를 철사줄로 비비 틀어서 기형적 생김으로 조형하는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해왔다. 마치 노변에 기형적인 인간들을 만들어서 구걸을 일삼은 패거리들 같이 나무에 대한 이런 행태, 분재라는 행위는 자연스런 삶을 왜곡시키는 옳지 못한 행위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 아름답다. 낙과의 운명을 거역한, 그냥 배가 아니라 바이오 작품이다. 가녀린 꼭지에 매달린 무게, 그 버거울 덩치를 버텨주는 엄마 가지의 힘이 어떻게 가능한 지 그 신비를 만들어 낸 비결이 궁금하였다.

우람한 분재 모과나무에도 두어 개의 큼직한 노란 모과들이 나를 보아 주세요’ 하며 매달려 있었다. 갈색조의 겨울나무 색상에 화폭의 강조점, 노랑 포인트를 큼직하게 찍어둔 화가의 붓질, 모과의 존재는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살아 있는 가지와 죽은 가지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주목朱木의 오묘한 몸매 역시 감탄스러웠다.

추운 날씨 오전 시간에 방문한 분재원은 한가로웠다. 덕분에 안내인은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낸 이 정원의 주인, 성범영씨를 만나도록 주선했다. 백발이 성성하고 달덩어리 같은 얼굴에 따스하고 살집 많은 손을 가진 칠순의 농부와 우리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제주 관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찬바람을 견디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배 하나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오래도록 그 정원의 여러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런 예술원을 이루어낸 주인공의 인생이 부러웠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의 인생 내력이 궁금하여 인터넷에서 이름을 검색하여 그가 쓴 책을 주문하였고 열심히 읽었다.

그는 경기도 용인 사람으로 물엣것(제주말, 외지인)이다. 젊은 시절 군복무를 마친 그는 서울에서 와이셔츠 매장과 공장을 열어서 성실하게 일한 끝에 성공하였다. 고객의 60%가 외국인이었다 하니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그냥 살아도 좋았건만, 군에서 만난 전우(제주 한림 출신)가 그를 불렀다. 몇 번 제주에 다녀간 그는 제주에서 정착하는 꿈을 꾸게 되었고, 친구의 부탁으로 한림면 저지리의 귤 밭을 샀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전원생활이 아닌가. 만 평 정도의 땅에 아담한 집을 짓고 2천 평 정도는 정원으로 꾸미고 분재와 나무를 키우면서 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제주가 좋아서 살다보니, 난쟁이나무들에 미쳐서 나무들과 40년을 살았고 마침내는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정원, 3만 평의‘생각하는 정원spirited garden’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나무와 돌에 미친 두루외(제주말,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35세에 아예 제주도로 주소를 옮겼고 분재는 문외한이었기에 책과 실전을 통하여 스스로 득도하는 험난한 과정을 겪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일에 전념하게 되었으니 오로지 나무 사랑이었다.

그는 타고난 사업가이면서 성실한 농부였다. 나는 제주에 갈 때마다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을 꽃돌로 생각하였는데 그도 그랬던 모양이다. 현무암을 사랑했다. 돌밭을 일구고 예술원을 열기까지 고생담은 처절하였다. 돌집을 스스로 짓고 돌문과 돌담도 손수 쌓아 올렸다. 완성품의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아내의 숨은 공이 커 보인다. 그녀는 보리와 된장에 알레르기가 있었다니 정착생활에 얼마나 애로가 많았겠는가 짐작된다. 간호사 출신으로 서울에서 사업을 할 때도 조직관리 능력이 있었고 후일에는 제주도의 문학잡지에 작가로 문학 활동을 하였다. 그의 책이 매우 간결하고도 신선하고 매끄러운 문장으로 써진 솜씨로 보아, 분재원도 책도 부부의 합작품으로 생각된다. 남편은 용기가 있고 부인의 활달한 성품이다. 부부가 천성적으로 부지런하였기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 사랑에 대한 그의 몰입은 정말 대단했다. 제주도에서 밀감 나무가 한참 성가를 누리던 시절에 성목을 모두 베어버리고 좋아하는 나무만 심겠다고 고집했으니 주위에서 두루외라는 별명을 붙일 만 했다. 분재원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잘 나가는 중에 IMF의 위기를 만났다. 그의 사업체는 부도를 내고 경매에 넘겨졌다. 모든 은행에서 융자는 거부되고 분재원의 나무들은 황무지 등급으로 판정되었다. 3년간의 엄청난 토목 공사 등 조경과 나무의 가치는 전혀 인정되지 못했다. 경매가 있던 날 그는 돌담을 쌓았다고 했다. “내가 만약 이곳을 떠나더라도 돌담을 쌓아두면 나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돌을 쌓았단다. 여섯 번의 부상, 수술 등 고난을 겪고서야 사업은 제자리를 잡았다.

그는 분재들이 애틋한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분재 하나를 키우는데 10년 또는 30년이 걸렸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분재에는 생명의 소중함과 견줄만한 사랑, 아픔과 소중함이 가득 사무쳐 있다고 말한다. 고생을 하며 얻은 문구 하나마다 생활철학이 듬뿍 실렸다. 생각해 보면 나무마다 자기의 모습이 따로 있다고 한다. 다양한 삶의 모양으로 인간에게 자연의 이치를 가르치고 있다고 갈파한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나무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긴 구도자에 비유한다. 겸손하게도 그는 분재들을 혼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의 햇빛, 자연의 섭리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고 말이다.

분재는 약 130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되어 고려 중엽에 한국에 들어왔고, 백제인 궁남지가 일본에 전하였다. 지금 세계의 분재 문화는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수백 년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장쩌민江澤民주석, 후진타오 등의 인물이 그의 정원에 다녀가고 중국에서는 ‘우리는 선생을 중국 사회개혁모델로 삼으려고 한다’면서 존경해 주고 있어서 40여 차례나 중국과 교류를 가졌다고 한다. 일본의 나까소네 총리도 다녀가고, 미국 뉴욕에서 발행되는 잡지<인터내셔날 본자이international bonsai>(일본이 분재를 세계에 소개하였기에 일본식 이름이 붙었다)에서도 이 정원을 특집 보도하여 세계의 분재 전문가들이 방문한다. 그는 이제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성장하였다.

“분재는 나무를 교정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야성의 화목을 설계한 모양에 따라 배양하고 다듬어서 최종적으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주는 나무로 만듭니다...모든 아버지들이 자식을 엄격하게 가르치며 키우고 싶어 하지요, 같은 도리입니다.” 그의 말은 분재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냈고 2005년에는 중국 최고의 인민출판사에서 중국어판을 출간하였다. 2006년 여름 그가 북경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천안문 광장의 소나무들이 모두 병들어 앓고 있는 아픔을 목격하였고 이 문제를 긴급히 해결해 주도록 요청하였단다. 불과 며칠 후에 천안문 소나무 163그루가 갱신 조치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실렸으니,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변이 일어난 게다. 초목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에 감동을 먹었던 모양이다. 천 년 전 신라의 최치원이 <황소격문>으로 황건족을 물리친 고사가 연상된다.

“...인생을 살다가 마음을 비웠다, 털어버렸다, 라고 이야기를 할 때가 있지만 그 비운 마음도 몇 년이 지나면 분갈이한 화분 속에서 뿌리가 꽉 차듯이 차버립니다. 왜냐하면 살아있기 때문이고, 인생에서 완성을 이룬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동감된다. 인생의 깨우침이 학업의 연수와 비례하는 것도 아닐 터, 일 만 시간을 몰입하면 성공한다는데 그는 십만 시간도 더 몰입하였으니 당연한 결실이다. 미국의 여류 정객이 한국의 젊은이들 앞에서 남긴 말이 생각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나머지 것들은 배경음악에 불과하다.”그는 나무를 사랑하였기에 이제 나무들의 사랑을 받아서 보은의 노년을 얻었다. 인생의 깨우침은 모든 사람의 길에 열려 있음을 절감하면서 그의 말이 귀를 울린다. ‘모과는 썩어야 향이 나고 향나무는 태워야 향이 납니다.’흥미롭게도 썩지 않은 모과가 그를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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