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칼럼
내용
하하는 새롭게 떠오르는 연예인 하동훈의 예명이다. 그는 요즘 시티콤에서 열연 중인데 그가 ‘TV는 사랑을 싣고’ 에 출연했다. 고교 동창생을 만나고 싶어서였는데, 그들의 지나간 우정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어려서는 우등생이던 그가 고교시절에는 껄렁한 학창시절을 보냈던가 보았다. 어느 날 시비를 걸다가 부딪친 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친구는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헤어지기 전 그는 친구에게 언젠가 TV에서 만나자고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 장면을 연습까지 했다고 한다.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친구는 미국 아트란타에서 직장을 가졌고, 하하는 연예인으로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국에 사는 친구가 귀국하여 함께 만나는 장면. 둘은 어색하지만 뜨겁게 포옹했고, 연습대로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 장면이 생각대로 실연되었는지는 몰라도 꿈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과거 세대들에게는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가 훈시의 기본이었다. 요즘도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훈계는 일제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배려가 없는 점에서도 요즘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하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국영수가 다가 아니다.” 라고 했다. 세상이 다양해지고 직업도 수만 가지인데 국영수 만으로 인생을 선택하려는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장면을 보면서 함께 보던 아내에게 “당신은 저 두 사람의 인생 중 내 자식이라면 어느 쪽이 되기를 원하느냐?” 고했더니 하하보다는 친구 쪽이라고 하였다. 연예인은 싫다는 뜻이었다. 역시 기성세대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동물기로 유명한 파브르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가 여섯 살 때 형제는 많고 집안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엄마가 막내인 그에게 오리 떼를 몰고 연못으로 가서 물을 먹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는 오리들이 물에서 놀도록 버려 두고는 연못 주변에 있는 수정돌 같은 잡동사니에 더 흥미를 느껴서 그것을 주머니에 담아오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들키고 말았다. 어머니는 탄식을 하며. “애들을 키워 엇나가는 꼴을 봐야 하다니! 네가 하도 속을 썩여서 당장 무덤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구나....이 참새머리야! 너, 제 정신으로 하는 짓이니?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거야?”
어머니의 탄식과는 달리 그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양털 옷을 입은 나비와 갑옷을 입은 쇠똥구리에 매료된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탐구에 열중한다. 어느 날 뒷짐을 지고 태양을 향해 섰다. 눈부신 햇살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호롱불에 끌리는 나방이다. 저 빛나는 빛을 보는 것은 나의 눈일까 아니면 나의 입일까? 눈을 감는다. 빛이 사라진다. 다시 뜬다. 빛! 두 눈으로 보는 것이구나!”
깨달음의 즐거움이여. 그는 아버지에게서 며칠만에 알파벳을 배웠고, 아버지는 그에게 책을 선물했다. 그는 책 속에서 성장해 갔고, 곤충과 세상의 신비에 취해 자기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서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피그말리오니즘’ 이란 말이 있다. 예술가가 창작품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인데, 뮤직칼 영화 <마이 페어레디>가 그 예이다. 영화의 원작 ‘피그말리온’은 버나드쇼가 쓴 희극이다. 중년의 독신 음성학자인 헨리가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 하층계급의 꽃 파는 소녀 일라이자를 3개월 안에 후작부인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내기를 벌린다. 일라이자는 성공했으나 헨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그를 버리고 떠난다는 스토리다.
교사가 제자를 양성하면서 성공을 확신하고 지도하면 그 제자는 성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교사의 관심은 일류대학교에 입학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고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마치 일라이자가 헨리를 떠나듯 제자의 마음은 스승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다.
하하가 고교시절 음악에 심취하였을 때 엄마의 심정이 파브로의 엄마와 어떻게 달랐을까? 부모들은 자기 시대적 틀에 매여 있고, 스승은 오로지 우수한 진학률에만 매달려 있다. 후손들의 진취적이고 자연적인 본능을 부당하게 통제하여 그 약동하는 본능의 아름다운 날개가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게 한다면, 그 책임은 ‘참새머리 부모’ 의 무지와 독선에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는 나름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약동한다.’ 이미 오래전 부처님이 설파한 법어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나름의 소망으로 꿈틀거리고 있는데 부모들은 그것을 통제하려 진땀을 흘린다. 문제는 언제나 부모의 시각의 높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높이 오르는 갈매기가 멀리 바라보고, 활(부모)시위가 많이 당겨지면 화살(자녀)은 멀리 날아가는 이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어려서는 우등생이던 그가 고교시절에는 껄렁한 학창시절을 보냈던가 보았다. 어느 날 시비를 걸다가 부딪친 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친구는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헤어지기 전 그는 친구에게 언젠가 TV에서 만나자고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 장면을 연습까지 했다고 한다.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친구는 미국 아트란타에서 직장을 가졌고, 하하는 연예인으로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국에 사는 친구가 귀국하여 함께 만나는 장면. 둘은 어색하지만 뜨겁게 포옹했고, 연습대로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 장면이 생각대로 실연되었는지는 몰라도 꿈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과거 세대들에게는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가 훈시의 기본이었다. 요즘도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훈계는 일제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배려가 없는 점에서도 요즘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하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국영수가 다가 아니다.” 라고 했다. 세상이 다양해지고 직업도 수만 가지인데 국영수 만으로 인생을 선택하려는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장면을 보면서 함께 보던 아내에게 “당신은 저 두 사람의 인생 중 내 자식이라면 어느 쪽이 되기를 원하느냐?” 고했더니 하하보다는 친구 쪽이라고 하였다. 연예인은 싫다는 뜻이었다. 역시 기성세대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동물기로 유명한 파브르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가 여섯 살 때 형제는 많고 집안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엄마가 막내인 그에게 오리 떼를 몰고 연못으로 가서 물을 먹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는 오리들이 물에서 놀도록 버려 두고는 연못 주변에 있는 수정돌 같은 잡동사니에 더 흥미를 느껴서 그것을 주머니에 담아오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들키고 말았다. 어머니는 탄식을 하며. “애들을 키워 엇나가는 꼴을 봐야 하다니! 네가 하도 속을 썩여서 당장 무덤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구나....이 참새머리야! 너, 제 정신으로 하는 짓이니?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거야?”
어머니의 탄식과는 달리 그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양털 옷을 입은 나비와 갑옷을 입은 쇠똥구리에 매료된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탐구에 열중한다. 어느 날 뒷짐을 지고 태양을 향해 섰다. 눈부신 햇살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호롱불에 끌리는 나방이다. 저 빛나는 빛을 보는 것은 나의 눈일까 아니면 나의 입일까? 눈을 감는다. 빛이 사라진다. 다시 뜬다. 빛! 두 눈으로 보는 것이구나!”
깨달음의 즐거움이여. 그는 아버지에게서 며칠만에 알파벳을 배웠고, 아버지는 그에게 책을 선물했다. 그는 책 속에서 성장해 갔고, 곤충과 세상의 신비에 취해 자기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서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피그말리오니즘’ 이란 말이 있다. 예술가가 창작품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인데, 뮤직칼 영화 <마이 페어레디>가 그 예이다. 영화의 원작 ‘피그말리온’은 버나드쇼가 쓴 희극이다. 중년의 독신 음성학자인 헨리가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 하층계급의 꽃 파는 소녀 일라이자를 3개월 안에 후작부인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내기를 벌린다. 일라이자는 성공했으나 헨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그를 버리고 떠난다는 스토리다.
교사가 제자를 양성하면서 성공을 확신하고 지도하면 그 제자는 성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교사의 관심은 일류대학교에 입학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고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마치 일라이자가 헨리를 떠나듯 제자의 마음은 스승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다.
하하가 고교시절 음악에 심취하였을 때 엄마의 심정이 파브로의 엄마와 어떻게 달랐을까? 부모들은 자기 시대적 틀에 매여 있고, 스승은 오로지 우수한 진학률에만 매달려 있다. 후손들의 진취적이고 자연적인 본능을 부당하게 통제하여 그 약동하는 본능의 아름다운 날개가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게 한다면, 그 책임은 ‘참새머리 부모’ 의 무지와 독선에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는 나름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약동한다.’ 이미 오래전 부처님이 설파한 법어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나름의 소망으로 꿈틀거리고 있는데 부모들은 그것을 통제하려 진땀을 흘린다. 문제는 언제나 부모의 시각의 높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높이 오르는 갈매기가 멀리 바라보고, 활(부모)시위가 많이 당겨지면 화살(자녀)은 멀리 날아가는 이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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