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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어느 독일인의 죽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1.03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348
내용
김 종 길

스테판(가명)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수개월 전에 그는 독일인으로 살았고 그가 남긴 이야기는 먼나라 사람 나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는 마지막 해인 86세였을 때 베를린의 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아침 간호차 방에 들어간 담당 간호사는 엄청난 호통을 받아야 했다. 영문을 모르는 담당 간호사는 한국인이었다. 그녀가 귀국하였을 때 이때에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당신에게 간호받지 않을테니 나가라!” 고함을 쳤다. 간호사는 시퍼런 서슬에 눌려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외국 출신의 간호사에게 편견섞인 모멸적 언사를 서슴치 않았다.간호사는 서러운 느낌이 들었고 이유도 모른 채 문제를 일으키는 환자에 대한 질책도 걱정스러웠다.

독일인 수간호사가 달려와서 사연을 물어도 몇 번이나 퇴짜를 놓았고, 예절 갖춘 사과를 정식으로 네 번이나 받은 후에야 그는 이유를 밝혔다. 항상 해오는 자기가 받아야할 간호를 소홀히 당해서 화가 났다는 것이다. 그날 이른 새벽에 옆 방의 다른 환자가 사망 직전의 위기에 빠져서 온 간호사들이 그 환자에게 매달렸다. 스테판은 아침 7시에 기상하여 침상을 정리하고 양치후에 간호 점검을 받는 것이 일과였다. 그 날은 마침 애인의 생일이어서 조식후에 정장을 갈아입고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스케쥴’을 세우고 있었단다. 늦은 간호로 인하여 스케쥴이 헝클어졌으니, 화가 나서 양치도 조식도 안먹을 것이라고 고집을 풀지 않았다. 다른 환자 때문에 자신의 간호가 소홀해진 점에 대하여 ‘무시 당한 분노’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스테판은 치매도 아니었고 심장에 문제가 있을 뿐이어서 판단력은 문제가 없었으나 상황적 이해는 통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그가 애인과 통화하도록 달래고 얼러야 했다. 한국인 간호사는 이미 늦기는 했지만 먼저 전화하고 양치를 해도 되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녀는 이미 외출했을 것이고, 어떻게 양치도 안한 입으로 애인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느냐?!” 고 주장하였다. “애인이 보는 것도 아니쟎아요?” “안본다고 그럼 됩니까!” 더 화를 돋굴까 두려워 대화는 중단되었고, 결국 애인과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있는 무덤에 다녀왔다. 며칠후 호흡이 가뻐져서 사경에 이르렀다. 병동에서는 애인에게 연락하여 마지막 면회를 요청하였고 애인은 부지런히 병원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달려오고 있는 애인과 통화를 해가면서 의료진은 마지막 데이트 성사를 위하여 혼신을 기울였다. 애인이 도착할 때까지는 살려야 하는 최선의 노력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애인은 침묵하는 스테판을 만날 수 있었다. 애인은 그의 시신 옆에 마련된 침상에서 하루밤을 새우고 다음날 떠났다. 지켜보는 간호사들의 심경이 오히려 착잡하였단다.

한동안 간호실에서는 그의 생전에 대하여 말들이 모아졌다. 그는 젊은 시절에 열쇠 장수를 하였다. 이차대전의 소용돌이에서도 용케 돈도 모으고 넉넉한 생활도 하였다. 그의 만년의 사고방식으로 보아 그는 어지간히 깐깐하고 정확한, 강박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만년의 삶은 양심에 충실한 성실성, 양치 안한 입으로 애인에게 전화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모습이었다. 또한 노년의 그는 욕심장이 어린이였다. 자기것만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자기의 즐거움만이 중요하였다. 아내가 죽고는 곧 애인을 만들었고 또 정기적인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면서 아내의 무덤도 돌보았다. 알다가도 모를 이중성을 잘 해내면서 구린내 나는 입으로 전화를 해서는 안되는 청결성을 지켰다.

스테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착잡하였다. 독일인의 공통적인 부지런함, 성실성을 보았고 또한 자본주의 시대의 미숙하고 퇴행된 노인상을 보았다. 그의 퇴행 행동 속에는 여러 모순들이 숨어 있다. 그가 보이는 양심적 청결성은 아마도 젊어서 저지른 비양심적 행위들의 보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2차대전을 겪으면서 독일 사회는 인간으로서 많은 비양심적 기회를 겪어야 했을 것이고 열쇠장수의 직업 성격상 이런 일들은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양심적 인생을 살았더라면 그는 돈을 모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만년의 그처럼 이중적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욕심 많은 노인의 추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젊어서의 부정함을 정결로 승화하고자 하였으되 미성숙으로 실패하였다.

카나다의 큰 서점의 한 모퉁이 5층칸 전부에 들어찬 서적들이 모두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내심 놀라서 제목들을 열람하니 대충 그 내용들은 죽음을 준비하거나 죽어가는 이들을 돕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책들이 죽음을 다루고 있다니 의외였다. 사실은 나머지 방대한 책들이 삶을 다룬 것을 볼 때 죽음을 다룬 책은 너무 적은 것이기도 하다.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한 선사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을 숙연케 하면서 죽음도 준비해야 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이 다가온다.

스테판의 노년은 준비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진정 성숙한 노년의 사람은 그런 모습이 아닐 것이다. 국적을 초월하여 노인의 성숙한 모습은 같을 일이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아름다운 사랑을 겪은 독일인으로 노인 파우스트는 만인을 위한 노년을 구상한다. 그렇도록 열심히들 살아서 노년이 되었는 데, 스테판의 노년은 우리에게 어떻게 정리하고 떠나야 하는가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젊은이들(간호사들)에게 진정 사랑받는 호스피스 병동의 노인이 되고자 했다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들었어도 못들은 척, 보고서도 안본 척’ 하다가 조용히 떠났음직 하다. 그리하여 후일 회자되는 그의 모습은 성자 같이 뇌여질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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