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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1.03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838
내용
에피소드 하나.

고등학교 시절, 40년 전, 담임선생님의 무차별 구타사건이 떠오른다. 이미 작고하신 담임선생님은 마음은 좋은 분이었지만 성격이 급하시고 후일 국립대 국문과 교수가 된 학구파였다. 공부도 못하고 덩치는 레슬링 선수 같은 과묵한 급우 K가 문제였다. 그가 오후 첫 시간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왔다고 따귀를 한차례 때렸는 데, 구타반응이 없자, 주먹질이 퍽퍽 그리고는 발길질로 가열되어 그 큰 덩치가 뒤로 쾅 넘어지고서야, 선생님은 씩씩 숨을 몰아쉬며 매질을 멈추었다.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바라 볼 뿐이었다. 수년 후 들은 얘기인 즉, 그의 어머니는 이혼녀였고 K는 정신병으로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피소드 둘.

지금은 명문학원이 된 서울의 몇몇 학원들이 막 생겨나고 있을 때. 벌써 반세기가 다 되어 가는 세월의 아득한 예전. 나도 학원에서 대입을 위한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어 선생님의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히 울린다.
"여러분들이 왜 지금 이 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알아?"
우리들은 엉뚱한 질문에 멍청히 선생님의 입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 듯 다물리는 습관이 있는, 환갑이 넘은 선생님은 명문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은퇴한 교수님이었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한참의 침묵 뒤에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을 달아 주었다.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는 게야."
그 때는 이 말씀이 귓등으로 흘러갔다. 돈에는 만질 수 있는 돈과 만져질 수 없는 돈이 있는 데 공부를 안하면 그 보이지 않는 돈은 가질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문장이 세월이 지날수록 머리에 분명하게 새록새록 되새겨지는 현상이었다.

가끔 K가 생각난다.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인간의 개인적 내면의 역동(마음의 흐름)에 대하여 공부를 하다보니 그 때 선생님이 K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가 왜 수업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알 것이었고, 그에게 정신병이 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삐딱한 학생들, 바로 그런 아이들이 후일에 정신질환자로 발전해 나간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물론 한참 후의 일이었다. 임상경험이 많아질수록 이런 사레들을 더 많이 겪게 된다. 삐딱한 아이들은 매보다는 관심으로 다스려야 할 일이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그 때는 그런 사실이 선생님에게도, 우리에게도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참 답답한 일이다. 적어도 지성인에게는 말이다. 후일 경제원리 책을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원리가 있었다.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힘은 손에 보이지 않는 개인의 욕망들이 구매력을 좌우한다는 의미일 것인 데, 눈에 보이지 않는 돈과 연결이 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학력에 대한 열등감에서 해방되니까 자신감 잇는 인생을 살 게 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뜻으로 새겨지는 데, 작고한 이병철씨는 초등학교 졸업이 한(恨)이 되어서 일류대학 출신들만을 기용하여 삼성의 대군단을 거느렸다는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아동분석을 처음 창안한 안나 프로이트(지그문트 프로아트의 딸)가 쓴 글 에는 놀랍게도 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미워하고 있다는 귀절이 나온다. 선생님의 개인적 동기에서 유래된 적개심에 희생되는 아동들을 많이 관찰한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좋은 의사가 되려면 뼈를 깎는 훈련과 노력이 요구되듯이 좋은 교육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 시대의 영악스런 아이들 앞에서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되기는 쉽지 않을 일이다. '어른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스승의 설자리가 어려워지는 게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학원화되어 가는 학교의 실정에서는 학생들에게는 정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역설도 가능해 진다. 말이 많은 사람은 속은 허당(虛堂)이며 실제로는 불안한 사람이다. 애들이 말로 똑똑해진다는 것은 그 빈곳을 정으로 채워야 만 허기가 가득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피터팬 증후군(키만 크는 애어른)이 많아지고 있질 않는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양(陽)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음(陰)이다. 세상의 이치는 음양이 조화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 인정에 굶주린 마음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아서 맺힌 한이나, 일류학교 학력콤플렉스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동기들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우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실증이 중요한 세상에서, 그 실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약혼을 하고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어느 커플이 있었다. 서울과 부산에 떨어져 있는 사이에 전화로 무언가 엄청 화가 난 여자의 소리가 전해왔다. 여러 가지 사연들이 이야기됐는 데, 욧점은 결혼을 앞두고 피임약을 복용해야 하는 부작용이 무서워서 그런 이유들을 남자 때문이라고 돌리고 화풀이를 하는 사연이었다. 진짜 눈에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문제는 결혼은 하고 싶어도 임신에 대한 두려움에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걸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개인이나 국가나 속으로 흐르는 역동의 흐름,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연을 깨우치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이른 바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인 데, 전체 인구의 5 %수준으로 추정된다.
로또복권이 국민들을 열받게 하고 있는 시각에 누군가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정치막판의 정리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터뜨린 복마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해/ 그 길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찾기가 힘들어/ 아무도 그 길을 보여줄 수가 없어/ 각자 그 길을 찾아야 해 (스티브 윌, 하비 아든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안보이는 것을 잘 보는 눈이 바로 혜안(慧眼)이다. 혜안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산밑의 여러 등산로와 같다. 어느 등산로를 이용하더라도 정상에는 오를 수 있으나 인도자가 있으면 수월할 일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좋은 운명을 살게 되는 비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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