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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영화, 그 깊고 푸른 바다에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1.03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515
내용
영화는 마술이다.
사람들을 웃고 울리고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래서 영화인들은 마술을 창작하는 사람들이다. 부산의 영화 축제에서는 그 창작자들과 만나게 된다. 그 마술의 축제가 부산에서 시작된 지가 어언 7년이 되고, 올해는 무려 57개국 226편의 영화가 상영되어 부산은 정말로 영화의 바다가 된다.

이 축제는 미래지향적이고 열린 항구 도시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축제의 성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세계 8 대 영화제로 발돋음 했고, 그 위세가 도쿄영화제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영화관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 진정한 세계화 운동의 실천적 과정이 되었다.

매일 우리는 TV에서 영화와 접한다. 영화를 보여주는 TV상자는 지혜의 상자이나 바보상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화관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영화는 TV보다는 본격스크린에서라야 실감이 난다.
작고하신 어느 병리학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 공부하느라고 영화를 볼 시간이 없었기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한 달 동안을 매일 여러 영화관을 일하듯 돌아다니며 영화들을 감상했지. 아마도 평생 볼 걸 집중적으로 봤을 거야. 못 보던 걸 한꺼번에 해치웠지... "

그 분은 영화감상도 시험공부 하듯이 "해치워" 버리는 감상을 하였다. 물론 이런 식은 영화보기는 맛도 모르고 퍼먹는 식사나 다름없다. 그런 방식에는 감상 행위를 즐기는 멋도 낭만도 없기 때문이다. 그 분에게는 공부 때문에 밀린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법을 그렇게 택한 것이었고 그의 인생 또한 그랬다. 그것이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일이라면 관객인 우리에게는 즐거움이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그들은 폭포처럼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들겠지만, 우리 관객은 "호수"처럼 우아하고 평화롭게 감상하면 된다.

17년 전, 그 때 한국의 T.V 채널은 세 개뿐이었다. 따라서 공급해 주는 메뉴는 식상해 있거나말거나 먹어야만 했다. 극장도 비슷하였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나는 T.V를 켜고 놀랐다. 그 옛날 시골사람이 처음 한양의 대궐 앞에서 감탄했듯이 지금 세계는 잘 사는 나라, 자본주의의 대국을 부러워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올 수 있을까 하였다. 불과 십 여년 뒤 우리의 IT 산업은 이런 꿈을 실현해 주었다. 지금 나는 안방에서 수십 개의 채널을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올림픽 게임, 월드컵게임, 아시안게임 연속해서 세계적 행사를 치르면서 '꿈'을 이룬 것이다.

영화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으리라. 영화를 언제나 좋은 친구 삼아 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 대문이다. 나는 아직 남태평양의 발리섬에 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영화 '남태평양' 을 통하여 각인된 바다의 푸른 바다에는 무수히 들락거렸다. 영화는 나에게 환상적 즐거움을 주는가 하면 괴로움도 준다.

TV에 눈을 붙이고 앉은 밤 시간, 이것저것 채널을 돌리다보면 재미있는 프로가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자정을 넘기고 밤을 지새울 때도 있다. 꼬박 잠자리에 들면 영락없이 뒤척이게 된다. 내일이 다가오건만 불면의 밤을 뒤척이고 나면 다음날은 부시시한 아침을 시작하여야 한다. 그래서 죄 없는 영화를 나무란다. 오늘부터는 심야영화를 정말 안볼 거라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건만 끊지 못하는 담배처럼 또다시 영화에 빠져든다. 본능적 호기심을 어쩔 것인가. 호기심은 인간 의식주에 첨가되는 기본 본능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겨내기가 힘들고 그래서 자기의 최대의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통금 싸이렌을 모른다. 그들은 통금해제의 자유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중년의 세대는 통금시절에 익숙해 있었다. 이는 마치 채널의 단순과 다양함 속에서 선택을 놓고 헤매는 형국과 닮았다. 젊은이들은 밤의 시간을 어찌 소화할 지를 헤매고 있고, 내일에 쫓겨야 하는 중년의 나이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년의 밤은 잠으로 때워야 한다. 자야한다는 중압감. 그래도 가끔은 영화의 바다에 빠지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면 내일아침은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보려하고, 어느 채널을 택할 것인가 고민한다. 그러면서 내 심경변화를 주시한다.
리모콘 단추를 누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채널이 많은 미국사람들이 행복한가에 대한 엉뚱한 생각이다. 내가 17년 전에 본 미국, 그 다양함 속에서 그들은 지금의 나처럼 고뇌하지는 않았을까. 미국 대도시의 인구 20%가 우울병 환자라고 한다. 여러 가지 약물 중독과 우울 등의 신경질환을 합산하면 저들의 정신질환은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결코 행복한 게 아닌 것이다. 행복지수는 인도같이 TV 조차 귀한,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이 높다고 한다. 영화산업이 왕성한 곳이 인도라는 것은 알려져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영화산업이 왕성한 나라의 백성들이 보다 행복하다고 말해도 된다. 선택이 많은 데 더 불행하다고 느끼다니 삶은 참으로 모순덩어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영화가 그들 내부에 잠재된 꿈을 스크린에 재현시켜주기 때문이다. 잠재된 에너지는 형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스스로 보기가 어렵다. 영화는 그것을 바깥에서 비추어준다. 단돈 몇 천 원으로 창조적인 정신적 자극을 준다. 일상을 떠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가끔 나는 임상진료에 영화를 이용한다. 증상이 유사한 내용의 영화를 보도록 하고 그 영화를 통하여 깨우침을 갖도록 하는 대화를 유도한다. 영화요법이다.

영화의 바다, 열린 도시에 사는 시민이 된 게 행복해진다. 부산영화축제 속에서 땀에 저린 싱싱한 냄새, 머리칼에서 소금 냄새가 풍긴다고 묘사한 사람도 있다. 그런 소금냄새 섞인 밤의 부산에서 나도 축제를 맛보고 싶다. 나누고 싶다.
(2002. 11. 부산국제영화제를 앞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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