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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기계의 이웃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1.03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009
내용
출근을 서두르며 옷을 입는데 와이셔츠의 소매 자락 끝이 헤어져 있었다. 오래 입은 와이셔츠도 아닌 듯 한데, 세탁기 빨래를 하다보니 쉽게 상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말없이 주워 입고 집을 나서면서 세탁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예전 손빨래시절에는 한 벌로 수년을 입었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못하다. 기계세탁으로 가정주부는 편해졌지만 옷의 생명은 짧아졌다. 퍼지이론을 응용한 세탁기는 좀 나을지 모르나 손세탁을 쫓아오려면 아직은 한참 멀었다. 복사기를 쓰다보면 꺼멓게 프린트되기 시작하면 자동 스위치를 수동으로 조절하여 쓰면 튜너의 수명이 여러 주일 연장된다. 기계란 것이 두뇌가 발달되지 않아 사람의 머리같이 조정할 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영화 '매트릭스' 씨리즈의 주제는 인간과 진화한 기계의 싸움이다. 진화한 기계들이 인간의 세계를 공략하고, 이를 방어하려는 노력이 그 스토리인데 장면마다 등장하는 전투가 너무나 그로테스크하다. 영화의 제작기법이 첨단적이라고 하나 내게 전해오는 느낌은 지루하다 못해 질역스럽다. 블록버스터라는 흥미위주의 것이 되어 그러려니 하지만, 여기에서 기계의 세상에 직면한 우리의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사람의 몸에서 출생' 하여 어머니라고 하는 신비의 존재를 느끼면서 일생을 산다. 지금은 가상현실이나 언젠가 기계 세상이 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기계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런 이야기를 상상한 미래공상의 세계이다. 인공 수정된 인간은 기계 속에서 아기의 능력 수준에 따라서 먹이가 등급으로 차별화 되고 그 결과로 세상에 나왔을 때는, 지도자 그룹과 노동자 그룹 등으로 나누어져 배분되고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인권이란 오로지 지도자가 정하는 규칙에 따라서 순응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십 수년 전, 컴퓨터와 사람의 두뇌에 대하여 쓴 책을 읽었다. 거기에서는 인간과 인공두뇌와의 다른 점이 전기와 생화학적 전도의 차이라고 설명하였다. 인공두뇌는 다만 전기적 이진법에 의한 자극전도로 결정되나, 인간의 두뇌는 전기와 생화학적 전달이 요구되는 차이라는 점이다. 생화학적 전달을 설명하려면 매우 복잡하다.
우선 신경세포, 곧 뉴런이 다른 뉴런과 접속하려면 시납스라고 하는 접합부위가 필요하다. 이 접합부위는 아주 작은 틈새를 가지고 있어서 이 틈새를 이용하여 신호전달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한 쪽 뉴런의 신호가 전기적 자극으로 달려와서 말단에 이르면 이 틈새를 건너기 위한 배가 필요하다. 이 배가 아드레날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니 바로 생화학적 전도인 것이다.

일단 신호가 배를 타고 다음 뉴런에 도달하면 그 신호를 이어 받아서 이차 신경전달물질이라는 물질들이 작용하여 연속, 전달을 받는다. 다음에는 같은 현상들이 반복되면서 신호는 번져 나가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사람 두뇌 속에 백 억이 넘는 뉴런이 있는데, 한 뉴런이 갖고 있는 시납스는 수십에서 수만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나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은 이 시납스의 네트위크가 풍부하다는 뜻이다. 이진법의 단순한 원시적 컴퓨터가 인간을 쫓아오지 못함은 당연지사인데, 이제는 바이오 컴퓨터가 등장하였다. 생화학적 신호전달 기능이니, 인간두뇌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모호해졌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란 말이 있듯 사람은 본능적으로 오래 살고 싶듯이 기계도 만찬가지일 게다. 오래 버티고 죽지 않으려면 기계는 무엇을 먹고살까. 세탁기는 전기요, 자동차는 가솔린이다. 곧 에너지이다. 에너지라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산소가 불타면서 얻어지는 힘이다. 그것은 사람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기계와 사람은 결국 같은 원리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그 힘이 부족해진다면 인간이나 기계나 작동을 멈추기는 마찬가지다.

영화 '바이센티니얼 맨'에서 기계인간이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투쟁하는 과정이 나온다. 오랜 투쟁 끝에 결국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사랑을 이해하게되면서 숨이 끊어지고 만다. 영화의 메시지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사랑을 알게된 기계일지라도 인간과 같을 수는 없다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결국 기계와 인간의 차이는 사랑에 있게 된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역설도 가능해 진다. 그렇다면 기계에서 태어난 인간에게도 사랑은 있을까?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의 인간들도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그렸다. 다만 방식은 현세의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포옹과 성교에서 절정을 느끼지만 그들은 그런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부른다. 행복해지는 알약을 먹고 손바닥을 마주 붙이고 마주보고 있으면 엑스타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기계들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자판을 두드리면서 컴퓨터의 머리에 의존한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기계 속에서 산다. 기계는 이미 우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다.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란 말도 이제는 이웃사촌도 기계보다 못하다는 말로 고쳐야할 것 같다. 이왕이면 그 기계들에 생명을 주고 아껴주어야 더욱 좋은 이웃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물활론이란 말도 생겼는가 모를 일이다. 우선 나의 애마부터 잘 점검해 보아야겠다.

수필과 비평(여름호,2003)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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