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칼럼
내용
올 여름 휴가지는 제주도였다. 서귀포 옆 예래 마을이란 곳에서 일망무제의 태평양바다를 바라보면서 이틀을 보냈다. 낮에는 하루 종일 말매미들이 악을 쓰듯 울어대는 속에서 뒹굴고, 밤에는 통나무처럼 깊이 쓰러져 잠들어갔다. 육신의 안락은 포근하면서도 평화로웠다. 영혼마저도 잠들 수 있는 참된 휴식이 될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꿈의 세계는 함께 휴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떤 높은 다리로 만들어진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터널 앞에 이르렀는데 왠지 더 진전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서 후진을 시작하였다. 조수석에는 모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차는 똑바로 후진하지 못하고 건너편 차선으로 비스듬히 빗나가는데 멈추어지지 않았고, 이제 곧 가드레일을 들이 받으면서 추락의 위기에 있었다. 아니 차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저 중얼거릴 뿐 공포감은 없었다. 어어, 내가 죽는 건 아닐까. 그런데도 놀라지는 않고 추락과 동시에 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꿈을 꾸듯 자는 습관대로 자가 통찰을 위한 연상은 계속되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 날 치료를 받으러 온 주부환자의 말이 얼른 생각났다. ‘휴가를 가버리면 나는 어떡합니까’. 어린이 같이 난감해 짓던 표정, 그녀는 마치 정서적으로 퇴행된 어린 소녀가 기대고 있던 기둥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듯한 상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오랜 세월 귀찮게 구는 그녀의 칭얼대듯 하는 모습에 왈칵 짜증이 났었다.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앙이다. 미안하다는 죄책감과 함께 보상심리가 꿈속에서나마 그녀를 옆에 태우고 있었을 게다. 휴가는 함께 떠나되 터널이란 것으로 막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리라.
터널이란 휴식의 의미도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성교가 아닌가. 언제나 육체적 접촉을 갈망하던 그녀에 대한 나의 기피가 무의식이 되어 그녀를 차에는 태울 수 있었지만 유혹은 통제되고 있는 형태가 되었고, 그러면서도 이 사건은 현실이 아니니까 그렇게 겁날 상황은 아니라고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있었으리라. 레드카드를 꺼내 드는 수준에 불과하니까 정말 죽음을 실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공포 또한 생길 리 없었으리라.
언젠가 그녀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노골적으로 유혹적인 말에 대하여 ‘좋은 아버지는 자기 딸과 육체관계를 하지 않는답니다. 좋은 치료자는 좋은 아버지와 같아야지요.’ 하니까 그녀는 당돌하게 ‘선생님은 아버지가 아니잖아요.’라고 했었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일반 현실에 있는 게 아니라고 판단되었고, 심충 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대화는 그것으로 중단되었다.
내 꿈은 이런 직무에 관계된 것 뿐 아니었다. 연속되는 꿈에서 나는 어느 허름한 자취방에서 독신 생활을 하는 남자로 나왔다. 몇 명의 중년 여인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녁인 것 같았는데 어느 사이에 아침이 되어 나는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다시 저녁이 되어 퇴근을 하였고, 집에 왔더니 그들은 방안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니 손님들을 잊고 있었네...’내가 놀라고 있는 사이에 한 사람이 노골적인 비난을 하여 주변은 갑자기 웅성거리게 되었고,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그새 화면은 다시 바뀌어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 되면서 고교 동창생들이 되어 있었다. 그런 소란 속에서 꿈은 끝난다. 하필 왜 고교동창들인가.
내게는 이십년 넘게 달마다 모이는 봉사단체가 있다. 달마다 만나서 봉사를 위한 상담공부를 하는데, 얼마 전 나는 그 모임의 ‘친목의 밤’ 행사에 참석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실천을 못했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연락이 온 관계로 나는 퇴근 후 다른 모임에 참석한 후에 휴대폰으로 연락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그만 깜빡해서 휴대폰을 직장에 두고 나왔던 것이다. 그 모임에서 언젠가 나는 ‘실수의 의미’에 대하여 상세한 지도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들은 배운 그대로 나의 실수가 무의식적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고, 그때 가졌던 죄송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보았다. 꿈은 이십 년이 넘도록 만나고 있는 그들과의 관계를 마치 고교 동창들과의 관계와 같다고 강조함으로써 친한 친구들과 약속 한번을 어겼기로 대수냐고 스스로에게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쉬어도 마음이 함께 쉬지를 못하면 스트레스는 잘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건강한 사람도 이러기가 십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자주 듣던 가르침이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라’는 가르침이었다. 말은 그렇게 들으면서 실제로는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 줄 모르고 살아왔다. 노는 것도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렸다.
삼십이 훨씬 넘었던 어느 날의 기억이다. 친구들 가족들과 범어사 숲에서 한가하게 화투놀이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놀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생기면서 공연히 불안해졌다. 군복무를 마치고 종합병원에 근무를 시작한지 수개 월, 그동안에는 일요일마저도 오전 회진을 나가면서 병동을 챙기곤 하였기 때문에 갑작스런 편안이 오히려 죄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평생을 이렇게 일중독으로 보냈기 때문인지, 지금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일을 쉰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들으면 일중독이라 할 터이나 비슷하게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서는 공통된 느낌일 것으로 믿어진다. 근래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의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려운 세월을 보내게 되면 저절로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자연의 법칙에도 쉼이란 있을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물은 흐르면서 쉬지는 않는다. 폭포가 되어 떨어지면서 소를 이루게 되면 쉬는 것 같아도 잠시 맴돌다 다시 흘러내린다. 흘러서 쉬는 곳은 바다에 이름이요, 강이 바다에 이름은 곧 물의 죽음이다. 흐르지 않고 고이는 물은 상하는 게 이치다. 잠은 삶을 위한 필수적인 휴식이지만, 그 순간에도 심장과 폐는 쉬지 않는다. 주역(周易)의 원리에도 변하는 것이 있으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한다. 쉬는 것 또한 무엇이 다르랴. 잠을 잘 때도 세포는 쉬지 않고 일한다. 직장 또한 휴가철이 되면 쉬는 사람이 있으면 일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쉼과 일은 함께 진행된다. 육신이 휴가를 얻는다고 영혼까지 쉬기는 어렵다. 뇌 안에도 임무가 서로 다른 세포들이 있어서 직장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일과 쉼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의 사람들은 성격, 가치관과 경험적 현실이 복잡하게 칵테일 되어야 이상적이다. 쉼은 삶의 반대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의 관계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휴식이란 무엇일까. 프로이드가 주장한 ‘열반의 원칙’이 있다. 인간은 열반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다고 했다. 에너지를 제로상태로 환원하여 쉬고자 한다는 것이다. 열반에 이르면 육신도 정신도 쉴 수 있게 되겠지만, 살아 있으면서 정신이 쉬어야 진정한 휴식이다. 그렇다. 그것은 생각의 흐름을 막지 않는 것이다. 흐름을 막으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고 생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중지된 상태란 곧 마음이 비어진 상태란 뜻 아닐까. 그것은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 ‘그냥, 그렇게’보낼 수 있게 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휴가철만 되면 고생을 사서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중생이다. 나 또한 이렇게 앞장서서 달려왔으니 진정한 휴가가 될 리 있겠는가. 여름만이 휴가철이 아닐 것을.
휴가속에서도 짬만 나면 책을 들고 삼매에 빠지는 손아래 동서의 모습을 보면서 쉬지 못하는 내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긴 소파에 두 다리를 뻗고서 나른한 매미소리를 들으며 ‘그냥 그렇게’ 보내던 바닷가의 시간들. 잉크 빛 바다를 멀거니 바라다보는 그 나른함 속에서 그와 나의 속사정은 휴가를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나는 닮아 있는게다. ‘비어야 차는’ 실천행이 아직은 부족한 탓이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함께 행복해진다는 보시의 최고수준, 무외보시(無畏布施)를 일구월심 꿈꾸는 나의 보살행이 아직은 부족한 때문이리라(040828).
아쉽게도 꿈의 세계는 함께 휴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떤 높은 다리로 만들어진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터널 앞에 이르렀는데 왠지 더 진전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서 후진을 시작하였다. 조수석에는 모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차는 똑바로 후진하지 못하고 건너편 차선으로 비스듬히 빗나가는데 멈추어지지 않았고, 이제 곧 가드레일을 들이 받으면서 추락의 위기에 있었다. 아니 차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저 중얼거릴 뿐 공포감은 없었다. 어어, 내가 죽는 건 아닐까. 그런데도 놀라지는 않고 추락과 동시에 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꿈을 꾸듯 자는 습관대로 자가 통찰을 위한 연상은 계속되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 날 치료를 받으러 온 주부환자의 말이 얼른 생각났다. ‘휴가를 가버리면 나는 어떡합니까’. 어린이 같이 난감해 짓던 표정, 그녀는 마치 정서적으로 퇴행된 어린 소녀가 기대고 있던 기둥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듯한 상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오랜 세월 귀찮게 구는 그녀의 칭얼대듯 하는 모습에 왈칵 짜증이 났었다.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앙이다. 미안하다는 죄책감과 함께 보상심리가 꿈속에서나마 그녀를 옆에 태우고 있었을 게다. 휴가는 함께 떠나되 터널이란 것으로 막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리라.
터널이란 휴식의 의미도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성교가 아닌가. 언제나 육체적 접촉을 갈망하던 그녀에 대한 나의 기피가 무의식이 되어 그녀를 차에는 태울 수 있었지만 유혹은 통제되고 있는 형태가 되었고, 그러면서도 이 사건은 현실이 아니니까 그렇게 겁날 상황은 아니라고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있었으리라. 레드카드를 꺼내 드는 수준에 불과하니까 정말 죽음을 실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공포 또한 생길 리 없었으리라.
언젠가 그녀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노골적으로 유혹적인 말에 대하여 ‘좋은 아버지는 자기 딸과 육체관계를 하지 않는답니다. 좋은 치료자는 좋은 아버지와 같아야지요.’ 하니까 그녀는 당돌하게 ‘선생님은 아버지가 아니잖아요.’라고 했었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일반 현실에 있는 게 아니라고 판단되었고, 심충 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대화는 그것으로 중단되었다.
내 꿈은 이런 직무에 관계된 것 뿐 아니었다. 연속되는 꿈에서 나는 어느 허름한 자취방에서 독신 생활을 하는 남자로 나왔다. 몇 명의 중년 여인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녁인 것 같았는데 어느 사이에 아침이 되어 나는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다시 저녁이 되어 퇴근을 하였고, 집에 왔더니 그들은 방안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니 손님들을 잊고 있었네...’내가 놀라고 있는 사이에 한 사람이 노골적인 비난을 하여 주변은 갑자기 웅성거리게 되었고,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그새 화면은 다시 바뀌어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 되면서 고교 동창생들이 되어 있었다. 그런 소란 속에서 꿈은 끝난다. 하필 왜 고교동창들인가.
내게는 이십년 넘게 달마다 모이는 봉사단체가 있다. 달마다 만나서 봉사를 위한 상담공부를 하는데, 얼마 전 나는 그 모임의 ‘친목의 밤’ 행사에 참석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실천을 못했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연락이 온 관계로 나는 퇴근 후 다른 모임에 참석한 후에 휴대폰으로 연락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그만 깜빡해서 휴대폰을 직장에 두고 나왔던 것이다. 그 모임에서 언젠가 나는 ‘실수의 의미’에 대하여 상세한 지도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들은 배운 그대로 나의 실수가 무의식적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고, 그때 가졌던 죄송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보았다. 꿈은 이십 년이 넘도록 만나고 있는 그들과의 관계를 마치 고교 동창들과의 관계와 같다고 강조함으로써 친한 친구들과 약속 한번을 어겼기로 대수냐고 스스로에게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쉬어도 마음이 함께 쉬지를 못하면 스트레스는 잘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건강한 사람도 이러기가 십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자주 듣던 가르침이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라’는 가르침이었다. 말은 그렇게 들으면서 실제로는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 줄 모르고 살아왔다. 노는 것도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렸다.
삼십이 훨씬 넘었던 어느 날의 기억이다. 친구들 가족들과 범어사 숲에서 한가하게 화투놀이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놀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생기면서 공연히 불안해졌다. 군복무를 마치고 종합병원에 근무를 시작한지 수개 월, 그동안에는 일요일마저도 오전 회진을 나가면서 병동을 챙기곤 하였기 때문에 갑작스런 편안이 오히려 죄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평생을 이렇게 일중독으로 보냈기 때문인지, 지금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일을 쉰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들으면 일중독이라 할 터이나 비슷하게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서는 공통된 느낌일 것으로 믿어진다. 근래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의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려운 세월을 보내게 되면 저절로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자연의 법칙에도 쉼이란 있을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물은 흐르면서 쉬지는 않는다. 폭포가 되어 떨어지면서 소를 이루게 되면 쉬는 것 같아도 잠시 맴돌다 다시 흘러내린다. 흘러서 쉬는 곳은 바다에 이름이요, 강이 바다에 이름은 곧 물의 죽음이다. 흐르지 않고 고이는 물은 상하는 게 이치다. 잠은 삶을 위한 필수적인 휴식이지만, 그 순간에도 심장과 폐는 쉬지 않는다. 주역(周易)의 원리에도 변하는 것이 있으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한다. 쉬는 것 또한 무엇이 다르랴. 잠을 잘 때도 세포는 쉬지 않고 일한다. 직장 또한 휴가철이 되면 쉬는 사람이 있으면 일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쉼과 일은 함께 진행된다. 육신이 휴가를 얻는다고 영혼까지 쉬기는 어렵다. 뇌 안에도 임무가 서로 다른 세포들이 있어서 직장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일과 쉼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의 사람들은 성격, 가치관과 경험적 현실이 복잡하게 칵테일 되어야 이상적이다. 쉼은 삶의 반대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의 관계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휴식이란 무엇일까. 프로이드가 주장한 ‘열반의 원칙’이 있다. 인간은 열반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다고 했다. 에너지를 제로상태로 환원하여 쉬고자 한다는 것이다. 열반에 이르면 육신도 정신도 쉴 수 있게 되겠지만, 살아 있으면서 정신이 쉬어야 진정한 휴식이다. 그렇다. 그것은 생각의 흐름을 막지 않는 것이다. 흐름을 막으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고 생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중지된 상태란 곧 마음이 비어진 상태란 뜻 아닐까. 그것은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 ‘그냥, 그렇게’보낼 수 있게 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휴가철만 되면 고생을 사서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중생이다. 나 또한 이렇게 앞장서서 달려왔으니 진정한 휴가가 될 리 있겠는가. 여름만이 휴가철이 아닐 것을.
휴가속에서도 짬만 나면 책을 들고 삼매에 빠지는 손아래 동서의 모습을 보면서 쉬지 못하는 내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긴 소파에 두 다리를 뻗고서 나른한 매미소리를 들으며 ‘그냥 그렇게’ 보내던 바닷가의 시간들. 잉크 빛 바다를 멀거니 바라다보는 그 나른함 속에서 그와 나의 속사정은 휴가를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나는 닮아 있는게다. ‘비어야 차는’ 실천행이 아직은 부족한 탓이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함께 행복해진다는 보시의 최고수준, 무외보시(無畏布施)를 일구월심 꿈꾸는 나의 보살행이 아직은 부족한 때문이리라(0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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