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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불의 심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1.02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5280
내용
며칠 전 조간신문에 얹혀온 이상한 전단지를 받았다. 방화범을 신고해 달라는 협조공문이었고, 내용 중에는 골목에 세워둔 자동차들에 연속해서 방화사건이 자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로 불특정 대상을 향하여 불장난을 저지르는 일이 유행되고 있다. 일종의 테러라고 보아야 할 이런 사고들은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무서운 적개심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적개심은 실상은 우리 내면의 친숙한 것들이면서 경계해야 될 내용들이다. 인간심리가 불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불은 인류문명의 상징이다. 불은 밝음이고 생명이며 열정과 기쁨인 동시에 분노이며 저항이다. 주요한의 시(詩), '불놀이' 에서는 정열로, 현진건의 단편소설 '불'에서는 복수의 욕구를 상징한다. '불' 에서는 열다섯 살에 시집온 순이가 남편의 폭력과 섹스에 항거하여 집에 방화하며 즐거워한다.

기독교에서의 불은 계명의 율법이며 마지막 심판에 쓰일 형벌의 수단으로 예언된다. 부패한 인간세계를 심판하는 처벌로 세상은 엄청난 불구덩이가 될 것이라고 한다.

고대 힌두어권에서는 불의 어원이 가족이란 뜻이었다. 그들은 가족이란 말로 아궁이라 하였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가족이란 '아궁이 곁에 있는 자' 의 뜻이다. 불은 아궁이 옆에 둘러앉은 가족을 뜻하니 참 뜻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불이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온 보물이니, 그 보물을 둘러싸고 앉은 존재들의 의미가 우리 존재의 중심적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정월 대보름에 친구들과 창녕군 화왕산성에 올랐다. 3년 만의 행사로 달집을 태우는 불꽃축제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억새밭에 지른 불꽃은 엄청난 힘으로 타오르면서 요동질하였다. 달도 숨은 어두운 구름의 장막 속으로, 무수히 쏘아 올린 폭죽들은 굉음 속에 터져 내리고, 아름답게 만발한 불꽃의 잎새들은 찰나를 이기지 못하고 이카루스의 녹아 내리는 날개깃처럼 추락하였다. 예로부터 구경 중에는 불구경이 으뜸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실감나도록 불길은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억새의 불길은 여기 저기 온 산성에서 타오르며 서로 겨루는가 싶기도 하고 맞불도 되면서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에서는 사람의 불이 터져서 내리고, 땅에서는 대지의 불이 솟아오르며 공중에서 제비넘기도 하고 포효하는 용의 혓바닥처럼 넘실거렸다.

불길은 열정으로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온 산성이 시뻘건 불덩어리가 되었다. 불길은 아름다웠으나 두렵기도 하였다.
화왕산성의 억새불꽃은 어찌나 뜨겁던지 속세의 시름 따위는 모두 녹였다. 산성을 싸고 둘러선 엄청난 인파는 임진왜란의 전투장면을 방불케 하였다. 한반도 남단의 산성에서 이 천년을 두고 타오른다는 억새불꽃의 축전이었다.

대보름 불길이 꺼지고 사흘의 침묵이 흐르고서 땅속에서도 불이 일어났다. 거기는 대구지하철의 지하공간, 인간이 만든 공간이었다. 산성의 불은 천사의 축전이었으나 지하철의 불길은 악마의 축전이었다. 제물은 엄청난 인간의 목숨이었다. 천사의 불은 이만 명의 노래와 찬탄으로 하얀 연기되어 춤사위로 어우러져서 승천하였으나, 악마의 불은 검은 연기로 인간들을 질식하게 만들고 이백의 제물을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뒤에 남긴 검은 유체들의 형체는 혼돈과 저주와 통곡으로 남았다.

프로이트는 '불을 성감의 상징'이라고 하여, 불기의 뜨거운 감촉은 달아오르는 욕정의 상징이라고 하였다. 솟아오르는 화염은 페니스의 발기라고 보았다. 불장난을 하면 오줌을 싼다고 경계하는 것은 불과 성기를 연결시킨 의미로 볼 수 있다. 오줌은 물이요 물은 불을 죽이니 성적 열망을 죽이고자 하는 무의식적 발로가 오줌싸게라고 볼 것이다. 군대에 가면 부대마다 흔치 않게 성인 오줌싸게가 있어서 내무반에는 지린내가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이들은 불명예 제대라는 훈장으로 군에서 추방되고 있다. 혹이나 이들 중 하나가 사회에서 말썽을 피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 우리 선조들은 인체에서 나는 인화를 믿었다. 통곡하고픈 억울한 심사가 끓어 참다보면 이른 바 심화(心火)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신라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던 지귀의 심화로 영묘사 절간에 화재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고 전한다. 홧병의 원인이 고부간의 오랜 불협화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한 것도 심화적 이해라고 보겠다. 선조들이 현대적인 정신역동적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홧병은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적 특성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세계에서 불은 태양이나 다름없다. 불이 없던 인류는 미개인이었다.그리스 신화에서는 거인신(巨人神)의 한 사람,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세계에서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고, 분노한 제우스는 그를 청동사슬에 묶어서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로 응징하였다고 전한다.

억새불길의 솟구치는 화염은 겁먹는 나의 머리 속에서 초등학교 시절 온 춘천의 시가지를 삼켜버리던, 붉게 날름거리던 화염을 회상케 하였다. 그 때도 어느 미욱한 한 인간의 불장난이 어린 내 가슴과 다수의 사람들 마음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잿빛 멍자욱을 남겨준 것이었다.

대구참사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후유증을 겪을 것이다. 이른바 스트레스후 자극장애라는 외상성 신경증이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안전함을 확인하고 두려움, 분노, 비탄, 죄책감을 나타낸다. 다행감을 자축한 후에는 불만에 차서 구조대나 정부의 대책을 투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정신적 이상이 있던 사람이 재난 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다. 우울, 불안, 수면과 집중 장애, 성욕감퇴 등 여러 증상들을 앓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영원히 그 상처를 안고 살게 될 것이다.

대구참사는 위로는 정치가들의 잘못에서부터 아래로는 학교교육이 학원화되면서 인성과 안전교육을 소홀히 한 복합결과인지도 모른다. 재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험에 대비하는 안전교육은 이미 어린 시절의 학교교육에서 실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적개심의 안전관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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